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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잡기: 숨쉬고 눈뜨고

30대 후반, 좋아하는 음료는 뜨거운 물

by 걸어도 20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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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경악한 분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음료가 뜨거운 물이라니 그나마 커피도 아니고 차도 아니고 뜨거운 물이라니. 나도 경악했었다. 위장이 아직 튼튼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지금에 비해 몇 배가 더 높고(지금도 여전히 높지만) 술자리에 자주 불려 다니고 좋아하는 음료가 뭐냐고 물으면 시원한 맥주라고 답하던 20대에서 30대 초반의 나도 경악했었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꽤 유명한 일본 여성 가수가 인터뷰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료는 뜨거운 물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시 요가나 건강식에도 심취해있는 모양이었고 또 일본 자연식에도 관심이 많아 일본 관동지방의 메밀국숫 집에 가면 서비스로 나오는 메밀국수 우린 물도 좋아한다고 답했다.

 

왜 술이며 파티며 연애며 쇼핑이며 어쨌든 모든 쾌락을 다 즐겨놓고서는 30대 후반에 들어서면 마치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갑자기 조용한 환경을 쫓아 시골로 향하고 산을 타고 소박한 것을 먹고 마시기 시작하는지 젊은 나에게는 의문이었다. 아주머니들 SNS 프로필이 꽃 사진을 점철되는 것도 같은 종류의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40대 50대도 여전히 술고래에 매일같이 놀러 다니고 젊었을 때와 같이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그런 에너지가 넘처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좀 더 마음을 주었다.

 

2년 전 코로나가 온 세상을 휩쓸면서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사라졌고 혼자 있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한 번 꼭 햇볕을 받으며 길게 산책하는 걸로 규칙으로 삼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새인가 러닝을 하게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빨리 잠들게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게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나도 뜨거운 물이나 메밀국수 우린 물이 마시고 싶어졌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고 몰개성 하며 비웃던 어른들의 취향이 나의 것이 된 순간이었다. 

 

분하기도 하고 왠지 모를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은 바뀌기 마련이고 사람을 나이를 먹기 마련이니까. 싸구려 과일 칵테일을 시끄럽게 떠들면서 밤새며 마시는 게 좋던 나도 뜨거운 물 마시고 밤 10시면 잠에 드는 나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항의한다면 좀 겸연쩍겠지만 사람과 사람은 다르고 또 항상 한결같을 수도 없다며 양해를 구할 것 같다. 

 

그저 30대 후반이 되어 더 보수적이 되고 무뎌져 가는 것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타인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도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고 믿고 싶다. 

 

30대 후반, 

친구와 마시는 위스키와 맥주를 좋아한다. 

커피와 홍차도 좋아하고 메밀국숫집에서 메밀국수 우린 물을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마시는 뜨거운 물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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